브레히트는 이것이 진실을 왜곡하여 관객을 현혹시키는 `마약 효과`라고 규정하고, 이런 연극은 기존 체제의 옹호 수단으로 쓰이기 때문에 지양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서사(epic) 문학의 특징을 연극에 도입한 `서사극`을 제시한다. 이는 무대 위의 사건을 관객 앞에 그
중등 교육을 다녔다. 그는 여기서 좋은 성적을 받아 수업료를 면제받고 김나지움에 다녔는데 그 대가는 나치 청년단(Hitlerjugend)에 가입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9살부터 나치 청년단(Hitlerjugend)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전쟁이 종결된 후 미군의 감옥 수용소에 감금되는 일을 겪게 된다.
(4) 제2차 세계대전 이후
2차 대전 이후 독일의 연극계는 냉전체제의 영향으로 동서로 양분된다. 동독에서는 브레히트의 영향으로 서사극 계열의 정치성을 띤 연극이 주류를 이루었고 서독에서는 보르헤르트 등의 소위 전후 드라마가 많이 쓰여 졌다. 50년대에는 세계적 조류에 부응하여 부조리극이
신화” 로 묘사함으로써 패러디를 시도한다.
4.1.2 ‘식민화의 최초의 신화’ :
하이네 뮐러는 인류의 역사는 이성을 도구로 한 계몽과 개발의 역사, 다시 말해 식민화 의 역사로 보았다. 식민화 과정으로서의 인류 역사란 외양상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지만 자연정복과 착취를 통한 산업화,
하고 있는 것은 독자로 하여금 그 사실을 비판적으로 보고 스스로 깨닫게 하려는 그의 서사극의 기본정신임에도 불구하고 동독의 문화정책당국은 억척어멈이 종국에 가서는 각성에 도달해야 하지 않았을까 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따위의 마찰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브레히트는 갈등의 해소와 조화를
브레히트와 여러 가지 예술적 논쟁을 벌였던 루카치의 경우를 살펴보면 브레히트의 특별함이 잘 드러난다. 루카치가 브레히트와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출신 계급인 부르주아적, 시민적 문화를 미학적 모범으로 삼고 있는 것과 비교해본다면, 출
연극을 통하여 독일에서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성공하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그에게 순수예술은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고 연극은 정치적 수단일 뿐이었다.
피스카토르는 “극장이 정치적 기관이 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는 시사성 있는 정치적인 문제를 바로 무대 위에 올림
서사극적 요소는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이 국내에 정립되기 이전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근본을 한국 전통극의 특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 장에서는 한국의 전통 서사적 극작술에 대한 분석과 브레히트 이론과의 비교를 통하여 채만식의 <제향날>이 서사극으로서
<1> 드라마 역사 속 브레히트
1. 독일 희곡의 뿌리
1)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비극을 문학 최고의 형식으로 본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에서 주로 비극론을 전개하였다. 시학은 비극론이라고 할 만큼 많은 부분을 비극에 할애하고 있으며 특히 6~15장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다. 비극은 관객에
하였다. 브레히트는 고독한 작가적 삶과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찾기 보다는 분주한 활동을 찾았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대도시의 정글, 사람들과의 교제, 자신의 작업이 공적으로 속히 인정받는 것, 많은 협력자들을 좋아했다. 그는 연극이나 영화에서 필요한 공동작업을 이미 텍스트-생산 자체에 적